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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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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頭山(백두산)은 우리나라 「애국가」에서 東海(동해)와 함께 등장하는 자랑스런 민족의 聖山(성산)이다. 우리 국민들 모두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고 있다. 지난번 아시아 동계 올림픽 쇼트트랙 시상식장에서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 외친 어린 여자선수들의 모습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는 솔직한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와 언론은 그들의 영토를 빼앗기기나 한 듯 우리 선수단에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재발방지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렇게 발끈할 일은 아니다. 오늘의 領土主權(영토주권)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歷史主權(역사주권)의 입장에서 과거 문헌기록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임의로 자기 문헌을 왜곡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우리는 문헌 내용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해석한다. 즉, 우리는 「三國遺事」(삼국유사) 이래 「高麗史」(고려사),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 그리고 「大東輿地圖(대동여지도)」 등 우리나라의 역사·지리서에 모두 백두산의 전모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사서에 長白山(장백산: 중국의 이름)에 대한 기록은 없다. 만약 백두산이 중국의 장백산이라면 중국의 옛 기록에 빠질 수 없으며, 우리 책에만 그토록 자세한 내용이 수록되었다는 사실은 그 산이 우리 영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崔南善(최남선)의 「不咸文化論(불함문화론)」을 통해 백두산 중심의 우리 문화는 東아시아 문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주장을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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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1> 백두산과 천지(楊昭全의「中朝邊界史」p.152) |
「長白山」이란 地名은 「遼史」 이후 역사기록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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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2> 김정호의 백두산과 大池(天池) |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기 위해 중국은 최근에 「長白山문화론」을 통해 그들의 고문헌(「山海經」·「晋書」·「通典」)에 나오는 不咸山(불함산)을 滿族(만족)의 성산이라고 하여 중국 동북지방의 古民族(특히 여진족)의 지역문화로 설명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고리를 단절하고 있다. 백두산은 그후 蓋馬大山(개마대산: 「後漢書」), 白山(「漢書」)이라고 하였으며, 「遼史」(요사) 이후에 장백산이란 기록이 보이고 있다. 결국, 중국은 長白山문화론을 만들어 백두산을 우리의 역사적 연고권을 제거하기 위한 역사왜곡을 감행하고 있다. 영토와 나라는 바뀌어도 역사와 민족은 바뀌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한 것이다. 백두산은 한 개의 산이 아니다. 최고봉인 兵使峰(병사봉: 중국은 白頭峰, 북한은 장군봉, 일본은 大正峰)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험준한 巨峰(거봉)이 天地(천지)를 둘러싸고 있어 이를 총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백두산을 대표하는 병사봉이 현재 북한에 있고, 천지의 54.5%도 북한에 속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江源(강원)이 북한內(대연지봉)에 있기 때문에 역사적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분명히 그것은 우리 민족의 산이다. 백두산의 신비감은 병사봉 등 20여 개의 험준한 고봉(관일봉·백운봉·청문봉·복룡봉 등)과 그 장엄한 산봉우리에 둘러싸인 天池(천지: 원래 이름은 大池 또는 大澤)의 존재, 그리고 수많은 강들이 산록에서 시작되고 있어 산(하늘)과 물(땅)의 조화에 있다. 백두산의 위용과 함께 화산호수인 천지(둘레 13km, 평균수심 204m, 최고 수심 373m)는 천고의 비밀을 간직한 채 신기한 동·식물의 서식처가 되고 있으며, 오래 전에 없어진 宗德寺(종덕사)는 독립운동자들의 은식처였다. 특히 해맑은 물로 호수 바닥이 보이는가 하면 한쪽에는 온천물이 쉬지 않고 분출되고 있어 불가해의 자연이 주는 경외감에 놀라울 뿐이다. 우리 역사에서 백두산이 처음으로 나타난 기록은 「高麗史(고려사)」이다. 그 첫머리 金寬毅(김관의)의 「편년통록」에 虎景(호경: 고려 태조 王建의 조상)이 백두산에서 활동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실제로 성종 10년(991)의 기록(「고려사」 권3)에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백두산 밖으로 쫓아내 살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三國遺事」(삼국유사 권3 탑상4)에는 「오대산은 바로 백두산의 큰 줄기로 각 臺(대)에는 眞身(진신)이 항상 있다」고 하여 고려시대 이전부터 백두산은 신성한 산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천지에 대한 기록은 그보다 훨씬 뒤의 문헌인 「신중동국여지승람」(권50, 會寧都護府)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목을 끈다. <백두산은 곧 장백산이다. 이 산은 3층으로 되어 있는데 높이가 300리로 가로는 천리에 뻗쳐 있다. 그 꼭대기에 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송화강, 동북쪽으로 흐르는 것은 蘇下江(소하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두만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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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3>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백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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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4> 백두산유람노선도(연변대외 문화교류중심) |
압록강과 두만강의 江源은 天池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지가 압록강, 두만강, 그리고 송화강의 水源(수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으며, 그 후 「대동여지도」 이래 우리 국민들은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이를 그대로 믿고 있었다. 金正浩(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도 이와같이 그리고 있어 압록강·두만강의 江源(강원)은 천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중동국여지승람」(권48 서두의 지도)에는 앞의 기록과는 달리 두 강은 백두산록에서 시작되었다고 그려져 있으며, <지도1>의 「中朝邊界史(중조변계사)」에서 「장백산을 3강의 발원지로 설명하면서도 천지에서 시작된 것은 二道白河(이도백하: 송화강)뿐이라고 그리고 있다. 압록강(상류이름은 曖江)은 三奇峰(삼기봉) 아래서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두만강(중국에서는 圖們江)은 紅丹水(홍단수)에서 시작되었지만 천지에서 발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최근의 「백두산유람노선도」에도 이도백하만이 천지에서 발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 楊昭全이 쓴 「中朝邊界史」에서도 3강의 발원지는 백두산이라고 하면서 천지에서 시작된 것은 이도백하(松花江)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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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5> 송화강·압록강·두만강의 물줄기 |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닌 오도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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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토수가 서 있는 국경비 |
여기에 숙종 38년(1712)에 세운 백두산정계비의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토문강 문제가 복합되어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遼東志(요동지)에 「土門江 城東五百里 源出長白山 北松山 東流入 松花江」이라고 하여, 토문강은 분명히 두만강이 아니고 송화강의 줄기였다. 이에 우리는 토문강이 두만강과 별개의 것이며 천지에서 시작된 강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압록강도 병사봉 동남 4km 지점에 세운 정계비 바로 서쪽 대연지봉에서 시작되었으며, 송화강의 한줄기인 오도백하도 바로 그 동편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강이 토문강이다. 두만강의 江源에는 4개의 강이 존재한다. <지도5>에서 알 수 있듯이 제일 북쪽에 紅土水(홍토수), 그 남쪽에 石乙水(석을수), 그리고 그 남쪽에 紅丹水(홍단수)가 있으며 맨 끝(남쪽)에 가장 큰 西豆水(서두수)가 있다. 그중에서 서두수는 鶴頂嶺(학정령: 무산군 삼장면)에서 발원하여 茂山(무산) 서쪽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백두산과는 관계가 없다. 이 중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홍토수는 圓池(원지) 남쪽에 있는 강으로 1885년(乙酉勘界)과 1887년(丁亥勘界)에 우리 측(조선)에서 주장한 두만강의 원류이지만 길이가 너무 짧아 江源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중국 측은 석을수(처음에는 홍단수)로 국경을 정하자고 주장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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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백하 주변(남도향)의 창고. 한국 古代의 창고건물「부경」그대로이다. |
따라서 두만강의 江源(간도협약)은 석을수로 하여 547km로 그 길이를 설명한다. 다만 홍토수를 江源으로 할 때는 521km가 되기 때문에 두만강의 길이가 짧아진다. 여기서 두만강의 길이가 책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는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는 근거를 갖고 있다. 1941년도판 「일본지리부도」(守屋美智雄편)에도 오도백하를 토문강으로 표시하고 있다. 분명히 토문강과 두만강은 다른 강이다. 그러나 중국은 豆滿江(두만강)과 도문강(圖們江), 그리고 토문강을 하나로 보았다. 동시에 두만강은 오래 전부터 朝·中 간의 국경을 나누는 自然界河(자연계하)로 보고 있다. 필자는 토문강과 두만강의 江源을 확인하기 위해 2004년 12월에 두만강 줄기를 답사한 바 있었다. 관광을 위해 현재 두만강변으로 아스팔트길이 잘 포장되어 있다. 三合(삼합)을 南坪(남평)을 지나면 바로 강 건너 북한의 무산 철광의 뿌연 집들이 시커먼 매연 속에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崇善(숭선)과 廣坪(광평)을 지나면 홍토수의 물길이 시작된다. 지척의 강 건너 북녘 땅에는 드문드문 집들이 보인다. 큰길을 조금 벗어난 오지에 圓池(원지)가 있는데 중국에서는 홍토수의 시원지라고 한다. 갈수기(겨울)에는 물이 줄어 혼수 주변은 늪지로 되어 있지만 우기에는 홍토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선 홍토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홍토수가에는 1964년에 세운 정계비가 나란히 서 있다는 데서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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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6> 천지의 분할. 金日成-周恩來의 협상에 의해 天池가 兩分되었다. |
金日成과 周恩來의 天池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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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백하(토문강) |
1962년 10월에 북한(金日成)과 중국(周恩來) 사이에 국경조약을 맺은 후, 양측에서 현지조사를 하였으며, 1964년 3월 북한과 중국은 「朝中邊界議定書(조중변계의정서)」를 맺었다.
이때 천지를 북한이 54.5%(중국은 45.5%)를 가지고, 국경비 제5호(압록강변에 1~5호)와 제6호(두만강변에 6~21호)로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천지 동북쪽의 6호비로부터 홍토수가 석을수와 만나는 지점인 赤峰(적봉)사이에 국경비를 세운 것이다. 결국 두만강의 시원이 되는 홍토수, 석을수, 그리고 홍당수는 넓게는 백두산록에서 발원하지만, 천지에서는 시작되지 않는다. 압록강의 경우도 같다. 한편 오도백하는 松江(송강)에서 사도백하를 만나며 그 동쪽인 三道鄕(삼도향)에서 남쪽으로 흘러 백두산 동편에서 북한으로 들어간다. 국경 부근에는 중국과 북한군의 막사가 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북한 쪽으로 이어져 겨울이라 乾川(건천)이 되어 자갈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4km 서남쪽에 정계비가 있을 것이며 그곳에는 木柵(목책)과 石堆(석퇴)가 남아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정계비를 세울 때 두 강(압록강과 두만강)의 분수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오늘의 국경선이 지닌 엄중한 경계가 느껴진다, 결국 오도백하는 토문강인 것이다. 따라서 「대동여지도」(지도 2)에 나타난 「건천과 木柵·石堆(석퇴)」를 김정호는 두만강으로 오인하고 있다. 목책과 석퇴는 오도백하의 江源에 있는 것이다. 오도백하에서 만난 우리 민족의 흔적 오도백하의 중간지점에 南道鄕(남도향)이란 조그만 시골이 있는데 여기에는 南村(남촌)과 북촌이 있다. 이곳에는 1939년에 일제에 의해서 전라도 南原에서 「기획이주」된 100여 호의 동포가 살고 있으며, 그 부근(서남차)에도 堤川(충북)에서 이주한 제1세대의 노인이 살고 있다. 여기에는 아직도 고구려인이 즐겨 이용하던 土孚京(부경)과 같은 창고가 남아 있어 한민족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크게는 백두산에서 시작된 강이지만 천지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인들의 표현대로 천지의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다가 赤峰(적봉) 일대의 광평에서 땅 위로 솟아났다」고 해도 두만강(홍토수나 석을수)이 천지에서 바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병사봉 4km 남쪽에 있는 태연지봉의 서쪽(압록강)과 동쪽(두만강: 오도백하)이 분수령이 되었고 그곳 부근에 정계비를 세운 원래의 모습이 좀더 뚜렷한 두 강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양강도 삼지연군의 정계비 자리에는 북한 정부가 세운 아무 표시 없는 작은 白碑(백비)만 옛날의 아픈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 |